# 황동규의 시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ㅣ 오미자술
연필화 ㅣ 기항지 1
---------------------------------------------
기항지 2 ㅣ 병꽃 ㅣ 꽃의 고요
꿈꽃 ㅣ 빗방울 화석 ㅣ꿈, 견디기 힘든
---------------------------------------------
기억이 지워지면 ㅣ 친구의 무덤에서
더 비린 사랑노래 1 ㅣ 더 비린 사랑노래 6
---------------------------------------------
조그만 사랑노래ㅣ 삶을 살아낸다는 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꽃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캅,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유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없이
---------------------------------------------
* 오미자술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살짝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
* 연필화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
옅은 안개 속에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다
저수지 돌며 연필 흔적처럼 흐릿해지는 길
입구에서 바위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다
뵈지는 않지만 길 속에 그대 체온 남아 있다
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무언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 입으리
---------------------------------------------
* 기항지 1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
* 기항지 2
다색의 새벽 하늘
두고 갈 것은 없다, 선창에 불빛 흘리는 낮익은 배의 구도
밧줄을 푸는 늙은 배꾼의 실루엣
출렁이며 끊기는 새벽 하늘
뱃고동이 운다
선짓국집 밖은 새벽 취기
누가 소리 죽여 웃는다
축대에 바닷물이 튀어오른다
철새의 전부를 남북으로 당기는
감각의 긴장 당겨지고
바람 받는 마스트의 검은 깃발
축대에 바닷물이 튀어오른다
누가 소리 죽여 웃는다
아직 젊군
다색의 새벽하늘
---------------------------------------------
* 병꽃
아, 저 병꽃!
봄이 무르익을 제
그 무슨 꽃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자주색으로도 피고
흰색으로 피는,
모여서도 살고
쓸쓸히도 사는,
허허로운 꽃,
계획했던 일 무너지고 우울한 날
학교 뒷산을 약속 없는 인사동처럼 방황하다가
그냥 만나 서로 어깨힘 빼고
마주볼 수 있는 꽃.
만나고도 안 만난 것 같고
안 만나고도 만난 것같이
허허롭게
---------------------------------------------
* 꽃의 고요
일고 지는 바람 따라 청매 꽃잎이
누처럼 내리다 말다 했다
바람이 바뀌면
돌들이 드러나 생각에 잠겨 있는
흙담으로 쓸리기도 했다
'꽃지는 소리가 왜 이리 고요하지?'
꽃잎을 어깨로 맞고 있던 불타의 말에 예수가 답했다
'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꽃이 울며 지기를 바라시는가
왁자지껄 웃으며 지길 바라시는가?'
'노래 하며 질 수도....'
'그렇지 않아도 막 노래하고 있는 참인데,'
말없이 귀 기울이던 불타가 중얼거렸다
'음, 후렴이 아닌데!'
---------------------------------------------
* 꿈꽃
내 만난 꽃 중 가장 작은 꽃
냉이꽃과 벼룩이 자리꽃이 이웃에 피어
서로 자기가 작다고 속삭인다
자세히 보면 얼굴들 생글생글
이빠진 꽃잎 하나 없이
하나같이 예쁘다
동료들 자리 비운 주말 오후
직장 뒷산에 앉아 잠깐 조는 참
누군가 물었다. 너는 무슨 꽃?
잠결에 대답했다. 꿈꽃
작디작아 외롭지 않을 때는 채 뵈지 않는
(내 이는 몰래 빠집니다)
바로 그대 발치에 핀 꿈꽃..
----------------------------------------------
* 빗방울 화석
창녕 우포늪에 가서 만났지
뻘 빛 번진 진회색 판에
점점점 찍혀있는 빗방울 화석
혹시 어느저녁 외로운 공룡이 뻘에 퍼질러 앉아
흩뿌린 눈물 자국
감춘 눈물 방울들이
채 굳지 않은 마음 만나면
흔적 남기지 않고 가기 어려우리
길섶 쑥부쟁이 얼룰진 얼굴 몇 점
사라지지 않고 맴도는 가을 저녁 안개
몰래 내쉬는 인간의 숨도
삶의 육필로 남으리
채 굳이 않은 마음 만나면
화석이 두근대기 사작한다
----------------------------------------------
* 꿈, 견디기 힘든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
* 기억이 지워지면
새벽에 깨어 헤아려보면
뇌의 한 자리가 또 비어 있다
썰물 빠진 뻘같이
태풍 놀다 간 논같이.
물 빠진 개펄을 씻어내는 저 새벽빛.
기억 지워진 자리에
물감을 뿌리라
잭슨 풀록이 거나하게 취해 걸으며
듬뿍 적신 솔로 신가게 뿌린
우연의 물감을.
솔에서 떠나면소도 인연 채 끊지 못해
긴 줄 멈칫멈칫 그리고 지옥도 만들고,
점 하나 잘못 떨어져
일순 황홀한 천국도 되는,
무지게 채 지워지지 않은
눈물 방울
싱그럽게.
-----------------------------------------------
* 친구의 무덤에서
헤어진 지 일 년 후
장마구름 틈새로
하루 개인 날
망초꽃 자욱이 핀
멍도 높은 구름 위에서
너는 들키지 않고 살고 있구나.
-----------------------------------------------
* 더 비린 사랑노래 1
봄꽃 난폭하게 색칠하다 말고
막 떠난 언덕 밑
국민학교 친구의 집
쟁반에 딸기 들고 오는
친구의 막내딸
허리 아래 얼굴 훤칠하고
한 쪽이 조막손이다.
그 얼굴 아래
진한 그늘 가늘 넘실대는
수국
-----------------------------------------------
* 더 비린 사랑노래 6
비실비실 봄이 왔습니다
거실의 화초들이 베란다로 나갔습니다
옆집 화초들도 서둘러 나왔더군요
때 이른 꿀벌 하나가
하늘도 땅도 아닌 팔층으로 찾아왔다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되날아갔습니다.
화초들은 차가운 분 속에 발목들을 묻고
계속 떨더군요.
그들도 씨 시절을 그리워할까요
껍질 속에서 마음 따로 없던 때를?
내 머리와 가슴을 흔들어보니
무언가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
* 달밤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주리라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가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
* 조그만 사랑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고 사라지고
여기 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 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송이눈
----------------------------------------------
* 삶을 살아낸다는 건
다 왔다
동녘 하늘이 자잔히 잿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루.
바람이 지나가다 말고 투덜거린다.
엘리베이터 같이 쓰는 이웃이
걸음 멈추고 같이 투덜대가 말고
인사를 한다.
조그만 인사, 서로가 살갑다.
얇은 서리 가운 입던 꽃들 사라지고
땅에 꽃아논 철사 같은 장미 줄기들 사이로
낙엽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밟히면 먼저 떨어진 것일수록 소리가 엷어진다.
아직 햇빛이 닿아 있는 피라칸사 열매는 더 붉어지고
하나하나 눈인사하듯 똑똑해졌다.
더 똑똑해지면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이 가을의 모든 것이,
시각을 떠나
청각에서 걸러지며,
두터운 잎을 두르고 있던 나무 몇이
가랑가랑 마른기침 소리로 나타나
속에 감추었던 가지와 둥치들을 내놓는다.
근육을 저리 바싹 말려버린 괜찮은 삶도 있었다니!
무엇에 맞았는지 깊이 파인 가슴도 하나 있다.
다 나았소이다, 그가 속삭인다.
이런! 삶을, 삶을 살아낸다는 건... ...
나도 모르게 가슴에 손이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