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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시 4 + 꽃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 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 + 비 가는 비여 가는 비여  가는 저 사내 뒤에 비여  미루나무 무성한 둥치에도  가는 비여  스물도 전에 너는 이미 늙었고  바다는 아직 먼 곳에 있다  여윈 등 지고 가는 비  가는 겨울비  잡지도 못한다 시들어 가는 비 ​----------+ 새 거센 바람 속에 새가 난다 날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파득이는 저 혼신의 날개짓이 넓은 강 건널까 저 거센 힘과 파닥임 사이 아슬한 균형 박차고 기어이 날아갈까 날아 못 가고 몸 솟구쳐 이름 없는 새 오른다 바람의 숨막히는 쇠그물의 끝을 향해 작은 새 피 묻어 오..
김사인 시 3 + 그날   ㅡ1980년 봄을 위한 비망록갔지 흔들리며, 가슴속에 초조히 엇갈리는 기대와 불안을 애써 불지 르며 목이 쉬도록 소리소리 외쳤지. 이제 그만, 그만이라고 더러운 것들의 더러움과 또 비굴함을 온몸으로 소리 치며 갔지, 가슴은 부풀어 터질 것 같았어. 우리는 비로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서. 우리의 손으로 만든 기폭을 높이 들고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이제 아니라고 마침내 외쳤을 때, 우리 새벽이슬보다 곱고 순하게 빛났지. 빛났지 그날 쓰디쓴 굴욕과 알 수 없는 막막함의 멱살을 움켜잡고 혼신의 힘으로, 흔들리며 일어서  폭탄이  되어 달려갔던  그날, 우리는. --------------  + 영결  산 이들 남아 흰옷 입고 절 올리니 하늘은 말게도 개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한평생이 아득도..
김사인 시 2 + 밥 술 번쩍 깨리 두고 온 이들 떠올라 목은 메아리 밥 한 그릇의 묵묵한 의관정제! 그 곁에서 흩어지는 몸 겨우 추슬러봄 풀린 눈 다시 힘주어 뜨고 무릎 꿇어봄 복받쳐 오름이여 오오 나는 죄 많은 사람이로다 저 흰밥 고봉 너머 고향의 강물 넘실대고 낫질하던 팔뚝들 적적하게 돌아눕는 노모의 좁은 어깨 대체 나는 어디에 엎질러져 있단 말인가 돌아앉아 담배만 빨고 있는 굽은 등 밥 한 그릇 ------------+ 노숙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 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
김사인 시 1 + 꿈 올해엔 말이지,라고 쓰면 그 두 마디가 흰 팝콘이 되어 종이에서 튀어 오르는 거지 때죽나무 흰 꽃으로 퐁퐁 피어날 때도 있어 언제나 돈이 모자란 아내가 돌아앉아 한숨을 쉬면 순간 나는 담모퉁이로 날아가 시치미를 떼지 중년의 모과나무가 되지 오랫동안 점잖고 향기롭게. 아이들이 지쳐 돌아오면 겨울비 속을 터덕터덕 걸어 나무인 나 평화시장 앞까지 나아가네. 신호대기 붉은 등이 바뀌는 순간 숨죽였던 퀵서비스 오토바이 부대는 갈매기 떼가 되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고, 우도나 지도까지의 저 우아한 활강 기분 좋은 날은 대마도 근처까지 스윽 한 번 다녀오기도 한다네. 부은 발 어루만지던 노숙자는 갈매기에 놀라 지하도 벽을 쿵 들이받고, 순간 등 검은 신사고래가 되어 유유히 심해를 미끄러지네 쿠릴 열도 돌아 ..
여름 시 모음 3 + 수국 / 이문재 여름날은 혁혁하였다. 오래된 마음자리 마르자 꽃이 벙근다 꽃 속의 꽃들 꽃들 속의 꽃이 피어나자 꽃송이가 열린다 나무 전체 부풀어 오른다 마음자리에서 마음들이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열엿새 달빛으로 저마다 길을 밝히며 마음들이 떠난다 떠난 자리에서 뿌리들이 정돈하고 있다. 꽃은 빛의 그늘이다 ---------------------+ 장마 / 안수동 줄창 울고는 싶었지만 참고 참은 눈물이 한번 울기 시작하니 도저히 멈춰지지가 않는 거지 누군가의 기막힌 슬픔은 몇 날 몇 밤을 줄기차게 내리고 불어 터진 그리움이 제살 삭이는 슬픔에 이별한 사람들은 잠수교가 된다 해마다 7월이면 막혀 있던 둑들이 젖어 매일 하나씩 터지는 거지. --------------------------- + 여름날..
여름 시 모음 2 + 여름 / 나기철  감나무 잎이 창을 덮어 건너 아파트 삼층 여자의 창이 안 보인다 감나무는 내 눈을 우리 집 안방으로 돌린다 -------------------- + 여름 / 유자효  이 여름에  우리는 만나야 하리 ​여미어 오던 가슴을 풀어헤치고 우리는 맨살로 만나야 하리 ​포도송이처럼 석류알처럼 여름은 영롱한 땀방울 속에 생명의 힘으로  충만한 계절 ​몸을 떨며 다가서는 저 무성한  성숙의 경이 앞에서 보라. 만남이 이루는  이 풍요한 여름의 기적. ------------------ + 여름 / 이시영 은어가 익는 철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수박이 익는 철이었다 통통하게 알을 밴 섬진강 은어들이 더운물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찬물을 찾아 상류로 은빛 등을 파닥이며 거슬러 오를 때였다 ​그러면 거기 ..
여름 시 모음 1 + 여름 / 권오범 모든 것이 바쁘다   해는 화끈하게 삶고 싶고   장마는 구름에 물 적셔와   세상 물바다 만들고 싶고  ​그 등쌀 아랑곳없이 살아남아   기어이 대를 이으라고   바람이 초목들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후덥지근하게 지쳐버린 중복 허리  ​사람도 덩달아 수고로워야 한다   햇볕 피하랴 비 피하랴   시들고 물손받은 먹을거리들   어떡하든 살려 내랴  ​선풍기 냉장고 에어컨   부채라고 해서 마음 놓고 쉴 새 있겠는가   누워 빈둥대지 말고 하다못해 모기라도 쫓아야지   하루살이들 이별 파티 때문에 가로등마저도 ----------------------+ 여름 / 손석철 세월이란 그림 그리시려고 파란색 탄 물감솥 펄펄 끓이다 산과 들에 몽땅 엎으셨나봐 ------------------- +..
6월 시 모음 3 + 6월 / 김달진  고요한 이웃집의 하얗게 빛나는 빈 뜰에 우에 작은 벚나무 그늘 아래 외론 암탉 한 마리 백화와 함께 조을고 있는 것 판자 너머로 가만히 엿보인다 빨간 촉규화 낮에 지친 울타리에 빨래 두세 조각 시름없이 널어두고 시름없이 서 있다가 그저 호젓이 도로 들어가는 젊은 시악시 있다 깊은 숲 속으로 나오니 6월 햇빛이 밝다 열무꽃밭 한 귀에 눈부시며 섰다가 열무꽃과 함께 흔들리우다 ---------------------+ 6월 / 이정화  사방이 풋비린내로 젖어 있다 가까운 어느 산자락에선가 꿩이 울어 반짝 깨어지는 거울, 한낮 초록 덩굴 뒤덮힌 돌담 모퉁이로 스르르 미끄러져 가는 독배암 등줄기의 무지개 너의 빳빳한 고독과 독조차 마냥 고웁다 이 대명천지 햇볕 아래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