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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시 4 +  곗집 지풀 널부러진 마당 가득 시래기에 돼지뼈를 고는 곰국 내 자욱하였다 따순 방안엔 발고랑내랑 두엄 묻은 옷 쉰내랑 온통 콧설추를 분질러대도 삭정이빛 얼골들 그저 발그작작허니 곰삭은 육담들로 자글자글하였다 때론 찬바람 씽씽 부는 쌀값 쌀수입 논설고 화들짝허니 열어놓은 장짓문 밖, 죄 없이 푸른  마늘까지 삿대질 튀었지만 아무려나 오늘 하로쯤은 삼동네가 모여 북적하니 모처럼 사람 내 나는 곗집에 새뜸 북잡이 김생의 둥둥 북소리도 울렸다 그리하여 그리하여 뒷산 서래봉에 걸린 노루 꼬리 해 다 정들도록 곰국 자꼬 끓어도 좋았다 ------------+  귀가 때 아닌 가랑비가 내리는구나 또 한 해의 갖은 수고와 희망을 팔고 목로의 몇 잔 술에 터벅거리는 귀갓길, 또 한 해 마지막 아쉬움으로 타는 길가 ..
김광규 시 5 + 그 아득한 옛 조상처럼 하얗게 늙은 그를 만나려면 물론 돈이나 빽으로는 안 된다 냉난방이 된  쾌적한 실내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기도하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면서 그이 곁에 갈 수는 없다 아무리 성능 좋은 자동차라도 달려갈 수 없는 곳에 그는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를 만나려면 맨몸으로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전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자갈밭이나 진흙길을 땀 흘리며 두 발고 걸어가야만 한다 발이 부르트면 길가에 주저앉고 절록거리며 고개를 넘어 저녁 노을을 바라보다가 여울물 움켜 마시고 이정표도 없는 밤길을 한 발짝씩 무겁게 걸음 옮겨놓고 넘어지면 더듬더듬 기어가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의 곁에 도달한다면 온갖 지식과 재산 쓸데없고 모든 노래와 기도 필요 없고 마침내 그를 만나 기뻐하는 대신 그가 누구인..
김광규 시 4 + 강산 어렸을 적에 뚝섬 근처에서 헤엄치고 보트 타고 얼음 지치던 한강 다리를 건너 요즘은 출퇴근한다 낙동강은 고속버스나 KTX 편으로 건너 다녔지 강물에 손 한 번 담가본 적 없다 그래도 한강보다 낙동강이 길다는 것 알고 있지 젊은 날에는 설악산 대청봉에도 몇 차례 올라갔었고 울산바위 꼭대기에서 속초 앞바다도 바라보았다 지리산은 승용차에 실려 지나갔을 뿐 천왕봉에도 아직 못 올라갔다 그래도 설악산보다 지리산이 높다는 것 알고 있지 강도 산도 인터넷에 뜨니까 --------- + 달밤 한가위 달빛아래 유리창에 비치는 후박나무 그림자 보았나 가을바람에 가늘게 흔들리는 나무 가지와 잎사귀 들 수런거리는 소리  들어보았나 꼼짝 않고 멍하니 아무 생각도 없어 혼자서 창문 앞에 앉아 있었나 아니면 나뭇잎들 사이..
8월 시 모음 4 + 8월의 서정 / 권오범 늦둥이 한 둘 낳아 여봐란듯이 업고 어상반하게 늙어가는 옥수숫대 여남은 뙤약볕에 파마한 곱슬머리 처녀들 흐벅진 포대기 태를 보아 시집보내도 되겠다 어지간히 둔탁해진 분신들 때문에 팔이 활처럼 휜 채 애면글면하는 모과나무에서 말매미가 변써 타전하는 사랑노래 숭덩숭덩 저며 헤살 놓는 쓰름매미 맥문동이 꼬치꼬치 쌓아 올린 자줏빛 꿈이 옥구슬 목걸이로 영글어 곤댓짓하고 호박이 걸음걸음 퍼질러 낳아놓은 자식들 나 몰라라 뻔뻔스럽게 고개 들고 담을 넘는 뒤란 감나무 대추나무 석류나무 하다못해 푸새들마저 삶의 보람을 요령껏 조랑조랑 매달고 태평스럽게 건너는 성하의 강 나만 열대야에 주리 틀려 어리숭하다 ---------------------------- + 8월의 정사(情事) / 고은영 기..
8월 시 모음 3 + 8월 / 김귀녀매미소리 때문에 피를 토하는 8월 모과나무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나무 밑둥치엔 매미가 빠져나간 흔적이 역력한데 무슨 생각 저리도 깊이 할까 한 여름 뙤약볕에 바람이 바스락 남기고 간 매미허물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 저리도 깊이 할까 오지도 않은 내년 여름 미리 염려하며 요동도 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시간의 속도도 재지 못한 채 8월 무더위는 지나가고 작열하는 태양아래 매미소리만 애처롭다 매미 울음은 긴 여운을 남기며 천길만길 흩어진다 내 생애 다가오지 않을 저 울음소리 ------------------- + 8월 / 오세영 8월은 분별을 일깨워 주는 달이다. 사랑에 빠져 철없이 입맞춤하던 꽃들이 화상을 입고 돌아온 한낮, 우리는 안다. 태양이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저 눈부신 하늘이..
8월 시 모음 2 + 8월 / 김사인긴 머리 가시내를 뒤에 싣고 말이지 야마하 150 부다당 들이밟으며 쌍, 탑동 바닷가나 한바탕 내달렸으면 싶은 거지 용두암 포구쯤 잠깐 내려 저 퍼런 바다 밑도 끝도 없이 철렁거리는 저 백치 같은 바다한테 침이나 한번 카악 긁어 뱉어주고 말이지 다시 가시내를 싣고 새로 난 해안도로 쪽으로 부다당 부다다다당 내리꽂고 싶은 거지 깡소주 나발 불듯 총알 같은 별을 뚫고 말이지 쌍, --------------------- + 8월 / 노정혜 8월 닮아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8월 숲 닮아 시원한 거늘이고 싶다 8월 바람 닮아 가슴속 까지 시원하게 뚧어주는 바람 8월 닮아 여름 가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 싶다 8월은 더위 삭혀주고 논밭에는 풍성한 가을 주렁주랑 8월 더워도 좋아 좋아 --..
8월 시 모음 1 + 8월 / 고은영 뜨겁기도 하여라  풀들이 내지르는 향기  이 화폭 가득 번지는 욕정  잎새와 잎새 사이 청춘의 푸른 정기  힘차게 약동하는 그대의 손끝에  생명은 환희를 그리는 초록빛 전언  말과 말이 손을 잡고 가슴과 가슴이  열정을 쏟아 날개를 펴면  화르르 날아와 착지하는  행복한 그대 얼굴 -------------------- + 8월 / 반기룡오동나무에 매달린 말매미 고성방가하며 대낮을 뜨겁게 달구고 방아깨비 풀숲에서 온종일 방아 찧으며 곤충채집 나온 눈길 피하느라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푸르렀던 오동잎 엽록체의 반란으로 자분자분 색깔을 달리하고 무더위는 가을로 배턴 넘겨줄 예행연습에 한시름 놓지 못하고 태극기는 광복의 기쁨 영접하느라 더욱 펄럭이고 있는데 --------------------..
김수영 시 + 길 2 그 말이 없던 사람 평생 외톨박이 떠돌이였다. 그가 그리 길지 않은 일생을 마감한 곳은 해발 1,000미터의 광산마을이었다. 오랜 장마 끝 맑게 갠 날, 쏟아지는 빛 속에 눈부신 듯 서 있다가 나무토막 쓰러지듯 그는 그렇게 갔다. 한동안 같이 살던 여자도 있었다. 지은 죄가 있어 고향이 가지 못한 그는 길 위에서 살다 길 위에서 죽었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서 흘러들어온 지 모른 것처럼 그를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도 몰랐다. 결국 그가 쓰러 진 곳이 그의 고향이 되었다. ------- +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