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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시 모음 4 + 11월 / 김혜선 입술이 갈라져 피가 난다. 공원묘지 가는 길 가로수가 붉어졌다. 죽은 후에도 값이 그대로인 그의 그림이 감기약 봉지처럼 쓸쓸했다. 피가 번지는 영화 장면을 떠올리다 접촉사고를 냈다. 내가 내리고 그가 나온다. 담배를 물고 사진을 찍고. 명함 밖 얼굴을 확인하고 검은 넥타이 검은 선그라스 남자는 화면 속으로 사라졌다. G열 14번 좌석에서 화면까지 붉은 칸나가 일렁인다. 영화는 피로 얼룩진 남자를 화면 밖으로 던졌다. 꽃잎이 날린다 얼굴이 묻은 명함 한 장이 발밑에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죽음은 보험처리 하지요. --------------------+ 11월 / 장석남  이제 모든 청춘은 지나갔습니다 덮고 비린 사랑놀이도 풀숲처럼 말라 주저앉았습니다 세상을 굽어보고자 한 꿈이 잘못이었..
11월 시 모음 3 + 11월 / 김영호 가로수마다 누런 잎새가 한해의 줏어읽은 행간 속의 낱말들을 검붉은 가래로 내뱉고 있다. 그 밑에 기침하는 코스모스 손마다 한 웅큼의 상한 뉴스들이 쥐어 있다. 낮달의 마른 눈이 빈틈없는 사람들 눈에 강물을 찾고 몸 안의 것 다 빠져나간 갈대 마음만 찬바람을 막고 있다. 여름이 철새 깃에 업혀 가고 나무가 늙어간다. 일요일 저녁 언덕의 십자목 목젖이 꽉 메어 있다. ---------------------+ 11월 / 반기륭 일이 두 개 모이면 2가 되는 줄 았았더니 일이 두 개 모이니 11이 되네 산에 가보니 11자로 뻗어있는 나무들이 서로 키재기하며 직립을 하고 있네 평행을 이루며 마주보는 다정함 비바람 몰아쳐도 활처럼 휘어졌다 복원하는 균형감각 일 두개가 합쳐지면 2가 되기도 하고..
11월 시 모음 2 + 11월 / 강은교 ​수많은 눈썹들이 도시의 하늘에 떠다니네 그 사내 오늘도 허리 굽혀 신발들을 깁고 있네 ​이 세상 눈썹들을 다 셀 수 없듯이 이 세상 눈들의 깊이 다 잴 수 없듯이 ​그 계집 오늘도 진흙 흐린 천막 밑에 서서 시드는 배추들을 들여다보고 있네 11월. -------------------+ 11월 / 고재종 ​갱변의 늙은 황소가 서산 봉우리 쪽으로 주둥이를 쳐들며 굵은 바리톤으로 운다 밀감 빛 깔린 그 서쪽으로 한 무리의 고니가 날아 봉우리를 느린 사박자로 넘는다 그리고는 문득 텅 비어 버리는 적막 속에 나 한동안 서 있곤 하던 늦가을 저녁이 있다 소소 소 이는 소슬바람에 갈대숲에서 기어 나와 마음의 등불 하나하나를 닦아내는 것도 그때다 --------------------+ 11월 /..
11월 시 모음 1 + 11월 / 고은 낙엽을 연민하지 말아라 한자락 바람에 훨훨 날아가지 않느냐 그걸로 모자라거든 저쪽에서 새들도 날아가지 않느냐 보아라 그대 마음 저토록 눈부신 것을 ---------------- + 11월 / 노연화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 얼음이 가득하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 움츠린 어깨마다 수북한 근심 어둠은 더 빨리 얼굴을 들이민다 종종걸음으로 시간을 뒤쫓아도 늘 손은 비어있다 비어 있어도 아름다운 나무들 제자리 묵묵하게 삶을 다진다 비늘 떨군 담담함으로 12월을 기다린다 마지막이란 이름 붙은 것의 앞은 새로운 것을 준비하는 거름이라서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 것 낙엽을 떨구는 몸짓을 사람들도 한다 잠시 어깨 움츠렸다가 눈이 오면 곧 환하게 웃는다 ----------------- + 11월 / 박용화 한..
문정희 시 6 + 콩 풀벌레나 차라리 씀바귀라도 될 일이다 일 년 가야 기침 한번 없는 무심한 밭두렁에 몸을 얽히어 새끼들만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부끄러운 낮보다는 밤을 틈타서 손을 뻗쳐 저 하늘의 꿈을 감다가 접근해 오는 가을만 칭칭 감았다 이 몽매한 죄 순결의 비린내를 가시게 하고 마른 몸으로 귀가하여 도리깨질을 맞는다 도리깨도 그냥은 때릴 수 없어 허공 한 번 돌다 와 후려 때린다 마당에는 야무진  가을 아이들이 뒹군다 흙을 다스리는 여자가 딩군다 ------- + 소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슬픔 끝내 입 다물고 떠나리 마지막 햇살에 떨고 있는 운명보다 더 무서운 이 살 이끌고 단 한 번의 자유를 위해 머리에 심은 뿔, 고목처럼 그대로 주저앉히고 보이지 않는 피의 거미줄에 걸린 흑인 오르폐처럼 떠나리 어쩔 수 없..
문정희 시 5 + 가치 음식값을 지불하고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넣었다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는 신용카드보다 크기가 더 작았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오는 동안 손때가 묻어 외관은 갈수록 볼품을 잃어갔다 눈에 보이는 모습은 때가 묻고 구겨져도 그 가치는 휘발되지 않았다 ----------+ 고백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일회용 컵 같아 자신 없어서 눈빛 마주 보며 고백 못하고 파도만이 알 수 있게 바닷가 난간에 목까지 자오르는 사랑을 적었으리라 "내 꺼니까 손대지 마" ---------- + 노화 노화는 삶의 나뭇가징서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쓸쓸한 거리로 지는 일이다 노화가 정지할 것 같아 낙엽을 책갈피에 끼워두었다 --------- + 동면 자연의 대지가 프로젝트를 완수하여 긴 휴식에 들어가면 나도  그대의 마음으로..
문정희 시 4 + 길 손을 잡자, 그대여 처음엔 시계처럼 두근거리며 다가서던 너 그렌데 어쩌자고 서른도 막바지에 여기  날 세워두고 새끼들까지 주루루 매달아 놓고 이렇게 뒷발길로 차버리는 거냐? ------- + 별 내가 별을 부르면 별은 아름답고 슬픈 응답을 보내온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선 채로 지상의 별이 된다 발 하나가 되고 별 둘이 되고 큰 별 하나로 함께 부서진다 -------+ 새 새는 죽어서 무엇이 되는가 그의 날개는 자유가 되고 깃털은 부서져서 햇살이 되는가 하늘을 응시하던 눈동자는 적막이 되고  날카로운 부리는 아름다운 칼이 되는가 그의 울음은 무엇이 되는가 아침마다 나의 잠을 깨우던 그 슬픈 울음 새는 죽어 바람이 되고 그 울음은 남아 우리들의 오랜 시간이 되는가 --------+ 섬 홀로 마시는 ..
10월 시 모음 5 + 10월 / 김현주 하늘은 더없이 맑고 떠도는 구름은 제일 인양 멋을 내고 들판에는 황금빛 노랫소리가 흐르고 바람은 잠자는 그리움 한 움큼 품고 지난 추억 만지작거리면서 홍엽(紅葉)으로 물든 오솔길을 즐긴다 활짝 웃고 있는길가에 코스모스 살빛에 하얀 미소 짓고 있는 구절초 온몸 흔들어 그윽한 향기를 토해내는 국화 짙어가는 가을빛은 우리들의 꽃과 사랑이 되고 하늘을 따서 색칠하는10월이 좋다. --------------------+ 10월 / 문계봉 10월의 속살을 본 적도 없는데 떠나는 10월의 등 뒤에서 만나는 이 아쉬운 표정과 애틋한 마음은 도대체 뭐지 기억하지 못하는 10월 어느 밤바람 속에서 책임지지 못할 마음 한 자락 취중(醉中)에 살짝 건넸던 건 아닌지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순간에 등을 보..